대학교에서 강의로 진행된 아레테고전강독(철학적탐구)를 진행하며,"철학적 탐구"의 책에 대한 리뷰입니다.


인상 깊은 구절

 

우리의 잘못은, 우리가 사실들을 '원현상들'로 보아야 할 곳에서 어떤 설명을 구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언어놀이가 행해지고 있다고 말해야 할 곳에서 말이다. (철학적탐구 p.308)

 

언어놀이를 우리의 체험들에 의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놀이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철학적탐구 p.308)

 

"그 당시 나는 ......라고 말하려 했다"란 표현의 문법은 "그 당시 나는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란 표현의 문법과 근친적이다.
전자의 경우에 그 기억은 의도에 관한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이해에 관한 것이다. (철학적탐구 p.310)

 

낱말의 쓰임에서 '표층 문법'이 '심층 문법'과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한 낱말의 쓰임에서 우리에게 즉시 각인되는 것은 문장 구성에서 그 낱말이 사용되는 방식, 그 낱말의 쓰임 중ㅡ말하자면ㅡ귀로 파악될 수 있는 부분이다. ㅡㅡ그리고 이제 가령 '뜻하다'라는 낱말의 심층 문법을 우리가 그 낱말의 표층 문법 때문에 추측하게 될 것과 비교하라. 우리들이 훤히 알기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해도 하등 놀라운 일이 아니다. (철학적탐구 p.311)

 

수용적 태도가 어떤 것에 대한 하나의 '지시'라고 불린다면,ㅡ그 지시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 얻는 감각에 대한 것이 아니다. (철학적탐구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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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은 구절

 

분위기의 기술은 특별한 목적들을 위한, 언어의 특별한 적용이다.
(('이해'를 분위기로서, 심적 작용으로서 해석하는 일. 우리들은 모든 것에 대해 어떤 분위기를 덧붙여 구성할 수 있다. '기술 불가능한 성격'.)) (철학적탐구 p.294)

 

"의욕도 하나의 경험일 뿐이다.", 이렇게 우리들은 말했으면 한다. ('의지'도 단지 '표상'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그것이 올 때 오며, 내가 그것을 일으킬 수는 없다.
일으킬 수 없다고?ㅡ무엇처럼? 나는 대체 무엇을 일으킬 수 있는가? 내가 의욕을 이야기할 때, 나는 그것을 무엇과 비교하는가? (철학적탐구 p.295)

 

그리고 우리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의욕하려고 결코 시도할 수 없는 한에서만, 나는 언제라도 의욕할 수 있다."

 

행함 자체는 아무런 경험의 부피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연장 없는 점, 바늘의 뾰족한 끝처럼 보인다. 이 뾰족한 끝이 본래의 동작 주체처럼 보인다. 그리고 현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단지 이 행함의 결과처럼 보인다. "나는 행한다"는 모든 경험으로부터 분리된 확정된 뜻을 지는 것처럼 보인다. (철학적 탐구 p.298)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예지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수의적 운동들이 예언된다는 사실을 늘 망각한다. (철학적탐구 p.301)

 

우리들은 의사가 개진된다고 말했으면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잘못은 있다. (철학적탐구 p.304)

 


"의욕도 하나의 경험일 뿐이다.", 이렇게 우리들은 말했으면 한다. ('의지'도 단지 '표상'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그것이 올 때 오며, 내가 그것을 일으킬 수는 없다.
 (철학적탐구 p.295)

 

질문: 의욕이 경험일까? 

 

의욕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마음'을 말하는데 이러한 마음도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의욕만으로는 경험을 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한 학기가 시작 될 때 어떠한 과목을 A+ 받겠다 라는 의욕은 단지 나의 마음가짐일 뿐이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데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떠한 과목을 A+ 받겠다 라고 의욕을 가지고 과목을 듣기 시작할 때 부터는 경험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들은 의사가 개진된다고 말했으면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잘못은 있다. (철학적탐구 p.304)

질문: 왜 "의사가 개진된다고 말했으면 한다. " 라고 말하는 것인가?

 

"의사가 개진된다고 말했으면 한다."는 의견이 개진된다고 말했으면 한다와 같은 의미인지 궁금하다. 만약 의견이 개진된다고 말하면 의견이 점차 나아져 발전함 또는 나아지게 발전시킴 인것인가? 지금 글을 적으며 생각을 한 것이 있다. 의견이 점차 나아져 발전함이 맞는 말인 것인가? 질문처럼 "의사가 개진된다고 말했으면 한다." 의 의미를 아직 확실히 잘 모르겠다. 이 문장의 의미를 계속해서 생각해보며 '내적 갈등'을 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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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은 구절

 

철학적 질병들의 한 가지 주요 원인은 편식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사유를 오직 한 종류의 예들로 먹여 기른다. (철학적 탐구 p.289)

 

언어는 하나의 도구이다. 언어의 개념들은 도구들이다. 이제 우리들은 가령, 우리가 어떤 개념들을 사용하느냐는 큰 차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가령 우리가 어떤 개념들을 사용하느냐는 큰 차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이 결국 물리학을 미터와 센티미터로도, 피트와 인치로도 할 수 있듯이, 그 차이는 단지 편리성이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참은 아니다 예컨대 어떤 측정 체계에서의 계산들이 우리가 들일 수 있느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노력을 요구한다면 말이다. (철학적 탐구 p.281)

 

개념들은 우리를 탐구로 이끈다. 개념들은 우리의 관심이 표현이며, 우리의 관심을 주도한다. (철학적 탐구 p.281)

 

'내적 과정'은 외적 기준들을 필요로 한다. (철학적 탐구 p.284)

 


언어는 하나의 도구이다. 언어의 개념들은 도구들이다. 이제 우리들은 가령, 우리가 어떤 개념들을 사용하느냐는 큰 차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철학적 탐구 p.281)

질문: 여기서 '어떤'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언어는 하나의 도구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고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체계, 사물, 행동, 생각, 그리고 상태를 나타내는 체계,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의미들의 체계, 문법적으로 맞는 말의 집합, 언어 공동체 내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말의 집합의 정의를 뜻하는 것 같다.

 

질문: 언어라는 것 자체를 왜 도구 취급을 하는 것인가?

 

언어를 도구 취급하는 이유는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언어로 의사소통을 할때 문법을 잘못 말하거나 발음이 안좋거나 해도 의사소통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언어 없이 이모티콘을 사용하여 말을 대신 하거나, 손짓과 몸짓으로 의사소통이 된다. 이러한 것 처럼 언어도 이모티콘이나 손짓, 몸짓과 같이 도구라고 취급하는 것이다.

 

견해를 지닌다는 것은 하나의 상태이다.ㅡ무엇의 상태? 영혼의? 정신의? 자, 우리들은 무엇에 대해서, 그것이 어떤 견해를 지닌다고 말하는가? 예컨대 아무개 씨에 대해서. 그리고 이것은 올바른 대답이다.
우리들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부터 아직 어떠한 해명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더 깊이 파고드는 물음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특수한 경우에 우리는 무엇을 어떤 사람이 이러이러한 의견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대한 기준으로 보는가? 언제 우리는 그가 그때 이러한 의견에 도달했다고 말하는가? 언제 우리는 그가 그의 의견을 바꾸었다고 말하는가? 등등.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대답들이 우리에게 주는 그림은 여기서 무엇이 문법적으로 상태로서 취급되는가를 보여 준다.
(철할적탐구 p.282)

질문: "무엇이 문법적으로 상태로서 취급되는가를 보여준다." 의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이렇게 말한 이유가 궁금하다.

 

위의 문장에서 아무개씨가 어떠한 문장을 말을 하였다. 우리는 "우리들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부터 아직 어떠한 해명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더 깊이 파고드는 물음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특수한 경우에 우리는 무엇을 어떤 사람이 이러이러한 의견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대한 기준으로 보는가? 언제 우리는 그가 그때 이러한 의견에 도달했다고 말하는가? 언제 우리는 그가 그의 의견을 바꾸었다고 말하는가? 등등." 과 같이 생각을 할 것이다. 아무개 씨가 말한 문장을 자신이 답을 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생각을 하는 동시에 우리는 답도 같이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문법적으로 상태로서 취급되는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내적 과정'은 외적 기준들을 필요로 한다. (철학적 탐구 p.284)

나도 '내적 과정'은 외적 기준들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외부에 대한 접촉이 없을 순 없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것, 디지털매체를 통해 영상을 보거나, 게시물을 보는 것, 사람들과 밥을 먹는 것 등등 모든 것이 외적으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다른 사람과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 문제가 어려운 것이라고 과정하고 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해결하지도 못한다고 생각하였을 때, 다른 사람이 풀어낸 과정을 나는 그 과정을 다시 풀어 볼 것인데, 다른 사람이 풀어낸 과정이 잘못 되었다고 판단이 되는 것도 외적 기준을 통해 '내적 과정'이 생긴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어떠한 친구 덕분에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어떠한 주장을 하면 친구는 그 주장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 준다. 이러한 이야기를 정답이 아닌 생각을 하게끔 하는 이야기였고,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나는 혼자서 곰곰히 생각을 많이 했다고 느낀다. 우리의 사고가 생겨나는 것도 어떠한 일을 겪거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깨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일,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외적 기준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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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은 구절

한 낱말을 이러한 의미로 듣는다는 것. 그런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가!
이렇게 표현되고, 이렇게 강조되고, 이렇게 들리면, 그 문장은 이러한 문장들, 그림들, 행위들로의 이행의 시작이다.
((다수의 잘 알려진 길들이 이러한 말로부터 온갖 방향으로 이어진다.))
(철학적 탐구 p.269)

 

어떤 것이 일어나기를 소망하는 것, 그리고 그 동일한 것이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것. 이 두 과정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들이 그것을 그림으료 묘사하고자 한다면, 우리들은 그 사건의 그림을 가지고 여러 가지를 해 볼 것이다. 즉, 그것에 선을 그어 지우기나 그 주위에 울타리를 두르기 등과 같은 것들을 말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보기에는 조야한 표현 방법이다. 낱말 언어에서는 "우리는 아니다"라는 기호를 사용한다. 이것은 서투른 미봉책과 같다. 우리들은 사유속에서는 일이 분명히 다르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철학적 탐구 p.274)

 

우리들은 가령 이 문장 속에서의 낱말의 기능에 관해 이야기했으면 한다. 마치 문장이 그 속에서 낱말이 특정한 기능을 지니는 하나의 기제인 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은 무엇에 있는가? 그것은 어떻게 백일하에 드러나는가? 왜냐하면 실은 아무것도 숨겨져 있지 않으며, 우리는 실로 그 문장 전체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기능은 계산법의 운행에서 스스로 들어나야 한다. ((의미체.)) (철학적 탐구 p.278)

 

"낱말의 의미는 의미의 설명이 설명하는 것이다. "즉: "의미"란 낱말의 쓰임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무엇이 "의미의 설명"이라고 일컬어지는가를 살펴보라. (철학적탐구 p.278)

 

개념들은 우리를 탐구로 이끈다. 개념들은 우리의 관심의 표현이며, 우리의 관심을 주도한다. (철학적탐구 p.281)

 


외침과 웃음은 의미로 가득 차 있다, ㅡ 이렇게 나는 말할 수 없는가? 그리고 그것은 대충, 그것들로부터 많은 것을 읽어 낼 수 있음을 뜻한다. (철학적탐구 p.272)

질문: 왜 외침과 웃음은 의미로 가득차 있다 말할 수 없는가?

 

나는 외침과 웃음은 의미로 가득차 있다고 말할 것이다. 외침은 '큰 소리를 지르는 일', '의견이나 요구 따위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일' 로 표현 하는데 '의견', '요구' 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변이 시끄러워 나의 의견이나 요구를 들어 주기 위해  외침을 하거나, 학생회장과 같은 직위를 가진 사람들이 의견이나 요구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웃음은 행복해서 웃거나, 슬프지만 웃거나, 헛웃음 등등 이 있는데, 이러한 행복, 슬픔, 헛웃음 모두 의미가 가득차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이다"란 낱말은 상이한 두 의미로 (계사와 등호로) 사용된다고 말하면서, 그것의 의미가 그것의 쓰임ㅡ즉 계사와 등호로서의 쓰임ㅡ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우리들은 이 두 종류의 쓰임이 하나의 의미를 낳지 않는다고, 같은 낱말에 의한 직무 통합은 비본질적인 우연이라고 말했으면 한다. (철학적탐구 p.279)

질문: 왜 같은 낱말에 의한 직무 통합이 비본질적인 우연이라고 말하는가?

 

같은 낱말이어도 쓰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부정에 대해 "X"와 "Y"라는 두 개의 상이한 말이 있는 어떤 언어를 생각하라. 이중"X"는 긍정을 낳지만, 이중 "Y"는 강조된 부정을 낳는다. (생략) (철학적탐구 P.276)

질문: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말이 있는데, 강한 긍정이 부정이 되는 경우가 있는가?

 

우리가 힘들 때, SNS에 게시물을 올릴 때 힘들다고 올릴 수 도 있지만, 힘든 것을 감추기 위해 다른 글을 적거나, 빗대어 말을 할 것이다. 예를들어 '나는 힘들다'라고 올리지 않고 '나는 행복하게 살고 있다' 라고 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강한 부정이면 부정일수록, 긍정을. 강한 긍정이면 긍정일수록, 부정을. 인간의 근본적인 심리와 원리가 그렇게 만든다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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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은 구절

 

 

우리들은 이렇게 말했으면 한다: "그것이 좋은 근거인 것은, 오직 그것이 그 사건의 발생을 실제로 개연성 있게 만들기 떄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이 실제로 그 사건에 어떤 영향을 끼치기 때문, 그러니까 말하자면 경험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철학적탐구 p.255)

 

경험에 의한 정당화는 끝이 있다. 만일 끝이 없다면, 그것은 정당화가 아닐 것이다. (철학적탐구 p.255)

 

"언어가 없으면 우리는 서로 의사소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건 아니다ㅡ그러나 필시: 언어가 없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이러하게 영향을 줄 수 없다, 도로와 기계들을 건설할 수 없다, 기타 등등이다. 그리고 또한: 말과 글의 쓰임 없이는 사람들은 의사소통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적탐구 p.257)

 

우리들은 문법규칙들을 "자의적"이라 부를 수 있다; 이것이, 문법의 목적은 단지 언어의 목적이라면 말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의 언어가 이러한 문법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이러한 사실들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ㅡ우리들은 여기서 "할 수 있을 것이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문해야 할 것이다. (철학적탐구 p.259)

 


우리들은 이렇게 말하려고 한다. 즉, 명령이란 그에 따라 수행된 행위의 그림이라고. 그러나 또한, 그에 따라 수행되어야 할 그림이라고 (철학적탐구 p.265)

질문: 명령이 결과를 만들어낸 행위, 그리고 과정을 만드는 행위란 뜻이 동일한 뜻인가?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간부가 용사한테 '산을 밀어라'라고 명령을 하는 것이 산을 미는 과정을 만드는 행위가 아닌 결과를 만들어내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부모님이 나에게 '커피를 타줘'라고 말(명령)을 했을 때, 내가 커피를 컵에 타는지, 그릇에 타는지, 집에서 타는지, 다른 장소에서 타는지 등등의 과정을 만드는 행위가 아닌 단지 '커피를 타줘'라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행위라고 또한 생각한다. 

 

나는 내 손가락이 책상을 건드리면 어떤 저항을 감지할 것이라고 가정할 어떤 근거들을 갖고 있는가? 어떤 근거들이 있어, 이 연필이 내 손에 꽂히면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믿는가?ㅡ내가 이렇게 묻는다면, 수백 가지의 근거들이 앞다퉈 나타난다. "어쨌든 나는 그것을 몸소 무수히 경험해 왔다; 그리고 비슷한 경험들에 관해 똑같은 정도로 자주 들어 왔다; 만일 그게 그렇지가 않다면, .....할 것이다; 등등."

질문: 저항이라는 언어를 고통이라고 해석하는 것인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저항은 '어떤 힘이나 조건에 굽히지 아니하고 거역하거나 버팀', 고통은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이라고 나와있듯이 나도 저항을 고통이라고 해석하는게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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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과 수행 사이에는 어떤 틈이 있다. 그 틈은 이해를 통해 메워져야 한다.
이해에서 비로소 그것은 우리가 이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뜨한다. 명령ㅡ그것은 그야말로 단지 소리, 잉크 자국일 뿐이다.ㅡ                            (철학적탐구 p.241)

 

모든기호"는 혼자서는 죽어 있는것으로 보인다. 무엇이 기호에 생명을 주는가? ㅡ 쓰임에서 그것은산다. 그것은 거기에서 자신 속에 생명의 숨을 받아들이는가?ㅡ 또는 쓰임이 그것의 숨인가? (철학적탐구 p.241)

 

계획은, 계획으로서는, 충족되어 있지 않은 어떤 것이다. (소망, 기대, 추측 등과 같이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뜻하는 바는, 기대는 그것이 어떤 것에 대한 기대이기 때문에 충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며, 믿음, 의견은 그것이 ‘어떤 것이 사실이다, 현실적인 것이다, 생각함의 과정 밖에 있는 것이다’라는 의견이기 때문에 충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철학적탐구 p.243)

 

우리가 "왜"라는 물음을 억제할때, 비로소 우리는 중요한 사실들을 종종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탐구에서 그것들은 우리를 어떤 대답으로 인도한다. (철학적탐구 p.252)

 


모든 기호는 혼자서는 죽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이 기호에 생명을 주는가?ㅡ쓰임에서 그것은 산다. 그것은 거기에서 자신 속에 생명의 숨을 받아들이는가?ㅡ또는 쓰임이 그것의 숨인가? (철학적탐구 p.241)

질문: 기호를 사용하는 방법 이외에 기호에 숨을 불어 넣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x,/ 처럼 수학적 기호를 보면 우리는 어떤 의미인지 바로 알아 차릴 수 있다. 이러한 기호가 쓰임으로 생명(숨)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철학적탐구에서 문장과 문장 사이에 ㅡ 라는 기호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책을 읽으면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읽었었다. 공동탐구를 진행하면서 교수님이 문장과 문장 사이의 ㅡ 기호가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 하였는데, ㅡ 의 의미는 강조나 부가 설명 또는 예를 들기 위하여 중간에 어구를 삽입하는 경우, 문장 안의 다른 어구들과 구분하기 위해 해당 어구의 앞뒤에 쉼표를 쓰는데 쉼표 대신 줄표를 쓸 수 있다. 삽입한 어구 안에 쉼표가 있을 때에는 삽입한 어구의 앞뒤에는 쉼표를 쓰지 않고 줄표를 써야 한다.(위키백과 참조) 라고 한다. 우리는 ㅡ 기호를 사용하지 않고 예를 들어, 또한, 또는 등으로 표현을 한다. 하지만 영어에서는 예를 들어, 또한, 또는 등을 사용하지 않고 ㅡ 기호를 사용하여 표현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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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은 구절

우리는 현상(예컨대 생각함)이 아니라 개념(예컨대 생각함이라는 개념)을 분석하며, 따라서 낱말의 적용을 분석한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추진하는 것은 명목주의인 듯이 보일 수 있다. 명목주의자들은 모든 낱말들을 이름들로 해석하는 잘못, 그러니까 낱말들의 사용을 실제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기술에 대해 말하자면 단지 공수표를 주는 잘못을 범한다. (철학적 탐구 p.222)

 

상상가능성이 우리의 탐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해서는 불명료성이 존재한다. 즉,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문장의 뜻을 보증하는지에 관해서 말이다. (철학적 탐구 p.226)

 

"물론 나는 '지금 나는 이러이러한 표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나는 지니고 있다'란 말은 단지 다른사람들을 위한 신호일 뿐이다; 표상의 세계는 전적으로 표상의 기술에 묘사되어 있다."ㅡ당신이 뜻하는 바는, "나는 지니고 있다"는 "자, 주목!"과 같다는 것이다. 당신은 그것이 실제로는 달리 표현되어야 마땅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단순히, 손으로 어떤 신호를 하고 나서 기술함으로써 말이다.ㅡ우리들이 여기서처럼(어째든 그 의무를 다하고 있는) 우리의 일상적 언어의 표현들에 동의하지 않을 때, 우리의 머리에는 일상적 표현 방식의 그림과 상층되는 어떤 그림이 자리 잡는다. 한편 우리는 우리의 표현 방식이 사실을 실제 있는 그대로 기술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마치 (예컨대) "그는 고통을 지니고 있다"란 명제가, 이 사람이 고통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도 여전히 거짓일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마치, 비록 그 명제는 뭔가 옳은 것을 부득이 주장할지라도, 그 표현 형식은 뭔가 잘못된 것을 말하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철학적탐구 p.229

 


"고통"이란 개념을 당신은 언어와 함께 배웠다. (철학적탐구 p.222)

질문: 언어 없이는 "고통"의 개념이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것인가?

 

언어 없어도 "고통"의 개념과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언어 없이 "고통"을 느낄 수 없는 것이라면, 언어가 존재하지 않았을 시기에 살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표출을 동작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문장과 관련해서 무엇인가를 상상하는 것은, 그 문장에 따라 어떤 소묘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문장의 이해를 위해서는 본질적이지 않다. (철학적 탐구 p. 226

질문: 문장과 관련해서 상상하는 것 이외에 문장 이해를 위한 본질적인 방법이 없을까? 애초에 없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문장을 이해할려고 할 때 상상(생각)을 바탕으로 문장을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언어의 문장을 봤을 땐 상상(생각)을 할 수 없고,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사전을 찾거나, 인터넷을 검색하는 행동으로 문장을 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나는 문장과 관련해서 상상하는 것 이외에 문장 이해를 위한 본질적인 방법이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사람에 대해서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하지만, 나무나 돌에 대해서는 그것들은 아무 의식도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사람들은 모두 무의식 상태일까?-아니다; 그말의 일상적인 뜻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나는 의식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내가 지금 실제로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의식을 말이다. (철학적탐구 p.236)

질문: 내가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경험의 사실인가?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경험의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생각을 바탕으로 개념이 생기고 개념을 통해 사고가 생겨 우리는 이러한 사고를 통해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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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은 구절

한 낱말이 어떻게 기능하느냐는 추측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그 낱말의 적용을 주시하고, 그로부터 배워야한다.
그러나 난점은 이러한 배움을 가로막는 선입견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선입견이 아니다.
(철학적 탐구 p.207)

 

문법에서 기준들과 징후들 사이의 동요는 일반적으로 오직 징후들만이 존재하는 듯한 가상이 생기게 만든다. 우리는 가령 이렇게 말한다: "경험은 기압계가 떨어지면 비가 온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경험은 우리가 습기와 추위에 대해 특정한 느낌들을 지니거나 이러이러한 시각 인상을 받으면 비가 온다는 것도 가르쳐 준다." 그러고 나서 이에 대한 논거로서 우리들은 이러한 감각 인상들이 우리를 기만할 수 있음을 진술한다. 그러나 이때 우리들은, 그것들이 우리를 기만하여 다름 아니라 비를 믿게 한다는 사실은 하나의 정의에 의거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 (철학적탐구 p.213)

 

물론 때때로 우리는 문장에 심리적 과정을 동반함을 "생각함"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동반자를 "사고"라고 부르지는 않는다.ㅡㅡ한 문장을 말하고, 그것을 생각해 보라: 그것을 이해하면서 말해 보라!ㅡ 그리고 이제는 그것을 말하지 말고, 당신이 그것을 이해하면서 말할 떄 그것에 동반한 것만을 해 보라!ㅡ(이 노래를 표정을 지으면서 부르라! 그리고 이제 노래는 부르지 말고, 그 표정을 반복하라!ㅡ그리고 여기서도 우리들은 무엇인가를 반복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몸을 흔듦, 빠르고 느린 호흡 등등.) (철학적탐구 p. 203)

 


물론 때때로 우리는 문장에 심리적 과정을 동반함을 "생각함"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동반자를 "사고"라고 부르지는 않는다.ㅡㅡ한 문장을 말하고, 그것을 생각해 보라; 그것을 이해하면서 말해 보라! - 그리고 이제는 그것을 말하지 말고, 당신이 그것을 이해하면서 말할 때 그것에 동반한 것만을 해 보라! (철학적탐구 p. 203)

질문: 그런 우리는 그러한 동반자를 왜 "사고"라고 부르지 않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내가 말하는 것을 "사고"라고 말하지 않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도 문장에 심리적 과정을 동반함을 "생각함"이라고 부른다." 라고 말했듯이 생각은 하나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통해 개념이 생기고 이러한 개념을 "사고"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 낱말이 어떻게 기능하느냐는 추측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그 낱말의 적용을 주시하고, 그로부터 배워야 한다. (철학적탐구 p.207)

질문: 낱말의 적용을 주시하고 배우는 것 자체가 추측하기 위한 행동이 아닌가?

 

책상이라는 낱말을 배울 때 생각해보면 책상이라는 이미지나 사물을 보여주며 낱말을 배운다. 이때  책상이라는 이미지나 사물이 책상이라는 낱말의 적용을 주시하지 이 낱말을 배울 때 추측한다고 생각 하지 않는다. 

대학교에서 강의로 진행된 아레테고전강독(철학적탐구)를 진행하며,"철학적 탐구"의 책에 대한 리뷰입니다.


인상 깊은 구절

한 낱말의 정당화 없이 사용한다는 것이 그 낱말을 부당하게 사용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철학적 탐구 p. 189)

 

우리는 어떤 과정을 더 자세히 알게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특정한 개념을 갖기 때문이다.
(철학적 탐구 p.196)

 

감각 표현의 문법이 `대상과 명칭’의 틀에 따라 구성된다면, 그 대상은 무관한 것으로서 우리의 고찰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철학적 탐구 p.191)

 

그런데 ‘나는 오직 나 자신의 경우로부터만 ……안다’라는 명제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명제일까? 경험적 명제? 아니다. -문법적 명제? (철학적 탐구 p. 191)

 


 

게다가 우리들은 "그는 고통스럽다." 대신 "나는 그가 고통스럽다고 믿는다."라고 말할려고 결심할 수 있다.
(철학적 탐구 p.194)

질문: "그는 고통스럽다." 대신 "나는 그가 고통스럽다고 믿는다."라고 말하려고 결심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믿는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고통을 직관(감)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인가?

 

고통은 직관과 직감이 동시에 일어나 이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샤워를 하기전에 물의 온도를 맞출 때, 물의 온도를 측정하기 위해 손으로 확인해본다. 물이 뜨거우면 샤워기 온도를 조절하는데, 다음번에 샤워를 할 때는 물이 뜨거운 것을 알기 때문에 샤워기 온도를 더 낮추어 물의 온도를 측정할 것이다. 이때 물이 뜨겁다는 것은 직감이고, 다음번에 샤워를 할 때 물이 뜨거운 것을 알아 샤워기 온도를 더 낮추는 것은 직관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통 "그가 고통스럽다."라고 말하지 "나는 그가 고통스럽다고 믿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공통탐구에서 "그가 고통스럽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고통에 대한 나도 고통에 대한 상황을 경험해 봤을 때 말을 하는 것이라 말하고, "나는 그가 고통스럽다고 믿는다."는 고통의 경험을 느껴 보지 못했을 때 말하였다. 하지만 나는 전부 "그는 고통스럽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고통에 대해 내가 상황을 경험하지 못하여도 그 상황과 비슷한 작은 경험 혹은 더 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작은 경험은 작은 경험들이 축적되 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내가 더 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학교에서 강의로 진행된 아레테고전강독(철학적탐구)를 진행하며,"철학적 탐구"의 책에 대한 리뷰입니다.


인상 깊은 구절

"오직 당신만이 당신이 그 의도를 지녔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말은, 우리들이 어떤 사람에게 "의도"란 낱말의 의미를 설명할 때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우 그 말의 뜻을 말하자면, 우리는 그 낱말을 그렇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철학적탐구 p.173)

 

"같은"이란 낱말을 예컨대 "동일한"이란 낱말로 대처하는 것도 철학에서 하나의 전형인 방편이다.
(철학적 탐구 p.176)

 

사적인 체험에서 본질적인 것은 실제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고유한 표본을 소유한다는 점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역시 이것을 지니고 있는지, 또는 다른 어떤 것을 지니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철학적 탐구 p.182)

 


철학자는 문제를 질병처럼 다룬다. (철학적 탐구 p.176)

질문: 모든 철학자가 문제를 질병처럼 다루는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치료철학으로 해석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한 철학적 문제의 성격과 해결 방법, 그리고 해결되고 난 뒤의 상태, 즉 철학적 활동의 결과 등을 살펴봐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를 우리 언어의 작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철학 활동을 문법적 탐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문법적 탐구의 결과 우리 언어의 사용에 대한 일목요연한 묘사, 명료성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이 명료성은 우리가 사물들을 보는 방식, 하나의 세계관이다. 그것은 우리 언어의 사용을 일목요연하게 본 사람이 성취한 결과이며, 의지의 저항들을 극복하여 얻은 태도 변경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철학적 문제들은 우리 언어의 작용에 대한 어떤 통찰에 의해서 풀린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목표인 명료성은 철학적 혼란에 빠지기 전의 상태가 아니라 문법적 탐구를 통해 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어떤 상태이다. 그것은 철학 활동의 결과 얻게 되는 무엇이지 철학 활동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의 대상은 철학적 혼란에 빠진 특정한 철학자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 언어의 사용이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목표인 명료성을 치료적 해석이 말하듯이 질병이 치료된 상태로 규정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대단히 협소한 이해이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표출하지 않는다면 어찌 될까? 그러면 우리들은 어린아이에게 ‘치통’이란 낱말의 쓰임을 가르칠 수 없을것이다. (철학적 탐구 p. 177

질문: 아픈 사람의 옆에 있는 어린아이가 아픈사람이 고통을 표현하면 고통을 배울 수 없는가?

 

아픈사람이 고통을 표현하면 어린아이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픈사람을 어린아이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고통을 표출하지 않는다면 나는 치통과 같은 낱말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어린아이가 치통이 아닌 다른 단어로 이름을 지어 냈고 사람들에게 이해 시킬려고 하면 어려울 것이다.

 


참고 한국학술지인용색인 Wittgenstein and Therapeutic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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